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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보 3대 회장 노진현 목사님 생애(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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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기보
댓글 0건 조회 8회 작성일 22-06-21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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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진현 제3대 대표회장 생애      

 들어가는 말

   노진현 목사는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사상 부산지역이 배출한 첫 번째 총회장이다. 부산 출신이면서 부산지역을 대표하여 총회장이 된 경우는 합동교단과 통합교단을 통틀어 지금까지 유일하다. 또한, 총회가 세칭 합동과 통합으로 나누어지기 전 마지막 1, 실제로는 2년 가까이(직전의 전필순 목사가 반년 정도 일하다가 도미하여 부총회장인 노 목사가 대신 일을 보았기 때문임) 교단을 이끌므로 장로교 역사의 중심에 섰던 총회장이었다.

노진현 목사는 6.25 동란의 와중에서 임시수도 부산의 중심교회인 부산중앙교회를 담임했고 부산을 대표하는 교정가로 활동했으며 해방 후 한국 장로교회가 분화되는 반세기 동안 줄곧 교정과 신학교에 관련해 왔다. 해방 전에는 일본에서 목회하고 노회장을 하여 일제시대 재일한인교회 와도 무관치 않다.

필자는 노진현 목사를 모시고 7년 가까이 부목사로 사역 하였기에(1968.7~1975.1) 비교적 잘 알 수 있는 위치여서 개략적이나마 그의 생애에 대하여 정리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노 목사의 목회와 교정에 대하여 간추려 소개해 보려고 한다. 본 내용의 대부분은 노진현 목사의 회고록과 필자가 직접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을 토대로 이들을 조합하고 재구성 하였음을 밝혀 둔다.

 노진현 목사의 준비 기간

  노 목사는 1904828일 부산 구포에서 기독교와는 무관한 평범한 농부 노원필과 장소개 씨의 가정 3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최상근: 노진현 목사의 생애와 목회 2) 노 목사는 구포에서 소학교를 졸업하고 동래고보(동명학교)에 진학하였으나 당시 이 학교는 스트라이크를 많이 하기로 유명하여 전국적으로 알려진 학교였다. 면학 분위기가 되지 않아 공부할 수 없어서 부모의 허락을 얻어 상경하게 되었다.

그가 소학교를 마치고 동래고보를 다닐 무렵 친구를 따라 교회를 찾게 되었다. 당시 구포교회는 초가지붕의 작은 교회로서 방 가운데를 막아 둘로 나누어 놓았으며 복판에 문을 하나 내놓고 남녀가 양쪽에 따로 앉아 예배를 드렸다. 서울에서 노 목사는 몇 군데 학교를 알아보다가 중동학교에 입학허락을 받게 되어 끊겼던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마침 서울에서 보성학교에 다니는 고향 친구를 만나 그를 따라 YMCA 뒤에 있는 중앙감리교회를 나가게 되었다.

그런데 그 교회에서 구포 소학교 여교사로 있었던 분을 만나게 되어 계속 그 교회를 다니게 되었고 방학이 되어 귀향하면 구포교회에 가곤 했다. 구포교회에서 어느 날 갑자기 기도를 시켜서 기도하였는데 하다가 중간에 막혀서 그냥 나와 버렸다. 다음 주일에 교회에 갈 용기가 나지 않아 피하려고 일찍 집을 나섰는데 대문밖에는 당시 은행 일을 하는 정진희 영수(노 목사도 그다음 언급에선 정진희 장로라 하여 1935년에 구포교회 초대 장로가 된 정진률과 동일인 듯함)가 기다리고 있다가 그럴 줄 알았다며 붙잡아 교회에서 도망칠 수 없었다고 한다. 또 어떨 때 저녁 예배 설교를 맡기면 무슨 말을 했는지 알 수 없으나 열심히 했다고 한다. 그러면 다음번에 나섰을 때 앞자리에 앉은 할머니 중에 노 선생, 지난번에 했던 얘기 참 재미있더라 한 번 더해라하였고 자기는 신이 나서 그 이야기를 다시 재탕했다는 것이다.

노 목사는 구포교회에서 학습과 세례를 받았다. 학습은 호주선교사인 예원배 목사에 받았다. 여기 예원배 선교사는 1912년에서 1942년까지 30년간 한국에서 일하되 마산, 진주, 부산을 중심으로 활동했으며 해운대교회는 경남노회가 예 목사의 선교 25년을 기념하여 설립하기로 하여 세웠고 설립 이듬해인 19386월 제41회 경남노회가 이곳에 모여 일제하의 기념비적 신사참배 거부결의를 하였다.

일제의 핍박이 극에 달하자 많은 선교사가 귀국했지만 예 목사 부부는 다른 3명의 선교사와 함께 마지막까지 남아있다가 강제 연금 및 출국을 당한 분이다. 또 노 목사는 세례를 주기철 목사에게 받았다. 주 목사는 1926년 봄에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12월에 초량교회 위임목사로 부임하여 처녀목회를 시작하였으니 당년 30세였다. 주 목사는 노 목사가 신앙생활 하는 구포교회 당회장이 되어 가끔 와서 설교하였고 때로는 노 목사가 초량교회 에 가서 주 목사의 설교를 들으므로 감화를 받았다. 그래서 노 목사는 자기가 순교자 주기철 목사에게 세례받은 것을 늘 자랑스럽게 말했다. 수세 연도는 1927년일 것으로 추정한다. 주 목사가 초량교회에 부임한 이후 구포교회 당회장을 맡은 19271월부터 노 목사가 진주 광림학교 교사로 부임하기 이전의 사이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때의 노 목사는 당년 24세가 된다. 이때의 비화로서 잘 몰라서 그랬는지, 워낙 사람이 없어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노 목사는 학습 교인으로 교회의 집사가 되었다고 한다. 주 목사가 노진현에 세례를 베푼 후 이 사실을 알고 집사직을 계속하라고 하더란다.

그러던 중 노 목사는 장질부사에 걸렸다. 그 당시 장질부사는 염병이라고 해서 친척들도 외면할 정도였는데 정진희 영수께서 은행 일을 마치고 퇴근길에 꼭 들러 환자를 위해 간절히 기도해주어 죽을 줄 알았던 노 목사의 마음에 큰 감격이 되었다.

노 목사의 병이 점차 호전되어 몸을 추스를 수 있게 되었을 때 미션 스쿨인 진주 광림학교에서 교원으로 와 달라는 초청이 왔다. 이 학교는 호주장로교 선교부에서 1906년에 설립하여 운영해온 소학교 과정으로 학생이 100여 명, 교원이 7, 8명 되었다. 이 일로 구포교회에서 노 목사의 멘토인 정영수께 의논하였더니 그에게 목사의 꿈이 내재함을 아는 고로 거기는 미션 스쿨이니 신학교에 갈 수 있는 길도 열릴 수 있으니 가라고 권유하여 광림학교에 부임했다. 그런데 그 학교 교장이 노 목사에게 학습을 세운 예원배 선교사였다. 노 목사는 광림학교에서 동료 교원 중 훗날 출옥 성도로 고신교단을 세운 한상동을 만났다.

그때 한상동은 노진현 보다 3세 연상으로 기혼이었다. 그 후 노 목사와 한 목사는 일본 고베와 한국 평양에서 각각 신학 공부를 하였고 부산이 고향인 이들은 해방 후 부산에서 목회하며 때로는 동료로, 때로는 이견을 보이면서 한국교회의 역사를 엮어나갔다). 노 목사는 광림학교에 재직하는 192810월에 역시 미션 스쿨인 진주 시온여학교 교원으로 와있는 황봉애 양을 만나 결혼하였다. 그즈음 광림학교는 신사참배를 완강히 거부하여 폐교의 위기에 있었는고로 노 목사는 예원배 선교사에게 일본 가서 신학 공부하도록 주선해 달라 부탁했고 그의 소개로 일본 고베 중앙신학교의 입학허락을 받아 도일하게 되었다. 한편 광림학교는 1929년에 폐교하게 되었다.

노 목사가 공부한 고베 중앙신학교는 보수적인 칼빈주의 학교로서 5년제인데 일 년에 10명 이상을 받지 않은고로 학생 총수가 50명을 넘지 못했다. 휴학하거나 건강상 혹은 다른 이유로 학업을 계속할 수 없는 경우들이 있기에 학생 수는 항상 4, 50명 선이었다. 그러나 전원이 기숙사 생활을 하되 규제는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 학교 출신으로 일본과 한국에서 유력하게 일한 분들이 많다.

국제적 지명도가 있는 가가와 도요히꼬도 이 학교 출신이지만 개혁주의 신앙 노선과 맞지 않아 모교 강단에 서지 못했다고 들었다. 한국에서의 졸업생은 김우현, 전필순, 김치선, 유호준, 김만제, 김광현, 한명동 목사 등으로 거의가 장기목회를 했고 자기 교단의 총회장을 역임했으며 교회와 사회 및 신학교육에 기여했다. 노 목사는 특히 풀톤 교장의 조직신학과 신앙인격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며 그를 흠모했고 설교는 마이어스 박사를 멘토로 여겨 언급하곤 했다.

그가 4학년일 때 학생들이 매년 2회씩 하는 정기검진에서 폐가 좋지 않은 것으로 나타나 교수회의에서 집에 돌아가 일 년 쉬었다가 오도록 결정하였으나 교장에게 필사적으로 매달려 계속 공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대단히 어려울 때 카나다 선교사 영재형 (L.L.Young) 목사가 그를 찾아와 도움을 주었다. 여기 영재형 목사는 당초에 카나다 장로교 파송으로 한국에 와서 함경도 지역을 무대로 선교했다. 그러나 카나다 장로교회가 타교파들과 합동하여 카나다 연합교회가 되었을 때 그는 합류를 거부하고 연합교회 선교회에서 탈퇴하였고 그 후 일본에서 선교활동을 했다. 이분은 대한신학교와 대신 교단을 만든 김치선 목사의 양아버지이다. 영 목사는 노 목사를 독일인이 운영하는 병원에 맡겨 두어 달 치료받게 한 후 치료가 끝난 다음부터 수업이 끝나면 선교사 서기 일을 보게 하였다. 이 때문에 졸업할 즈음에는 일이 고되지만 비교적 편한 생활을 할수 있었다.

노 목사는 신학교 1학년을 마치고 회중교회 계통의 3년 과정인 고베 여자신학교를 찾아가 교섭하여 황봉애 사모를 그 학교에 입학시켰다. 그리하여 노목사 내외는 일본 고베에서 중앙신학교와 여자신학교에 각각 적을 두고 따로 기숙사 생활하며 신학 공부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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